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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성씨를 알아보자 - 고대의 왕족은 남아있는가?

Bosskim 2014. 4. 2. 06:59


횡성 고씨(橫城 髙氏)는 대한민국의 희귀성본으로 동국 고씨, 또는 -제주 고씨의 분파와 구별하기 위해- 고구려 고씨로 불리기도 한다.

만주 요령지역의 요양 고씨(시조 장수왕), 일본의 고마씨(중시조 현무약광)와 함께 현존하는 고구려(고조 고려高朝 高麗) 왕족의 후손으로, 1824년 발견된 횡성 고씨 족보, 1995년과 2004년 강원일보의 보도기사로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시조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髙朱蒙)이다.



부여서씨(扶餘徐氏)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셋째 아들 서융(徐隆)이다. 그는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마지막으로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서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일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시조 박언침(朴彦忱)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의 맏아들로서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이를 연유로 해서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8세손 박언부(朴彦孚)를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8세손 박언상), 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8세손 박언인),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8세손 박양언), 판도공파(版圖公派: 8세손 박천익), 좌윤공파(左尹公派: 8세손 박을재), 진사공파(進士公派: 10세손 박원), 밀성군파(密城郡派: 13세손 박척), 동정공파(同正公派: 13세손 박원광),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15세손 박중미), 정국공파(靖國公派: 15세손 박위), 규정공파(糾正公派: 16세손 박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또 《박씨선원세보(朴氏璿原世譜)》에 의하면 10여개의 본관으로 분적(分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김씨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脫解王)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 이후 김알지의 7세손 김미추(金味鄒)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 왕 경순왕(慶順王)까지 38명의 왕을 배출하여 587년 동안 신라를 통치해 왔으며 경주(慶州)를 비롯한 600여 개의 관향(貫鄕)으로 분적되었다. 경주김씨는 김명종(金鳴鍾)을 일세조로 하는 영분공(永芬公) 명종파(鳴鍾派), 김은열(金殷說)을 일세조로 하는 대안군(大安君) 은열파(殷說派), 김장유(金將有)를 일세조로 하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장유파(將有派), 김인관(金仁琯)을 일세조로 하는 태사공(太師公) 인관파(仁琯派), 김문기를 일세조로 하는 백촌공 문기파, 김덕재를 일세조로 하는 병판공 덕재파, 김존일을 일세조로 하는 장사랑공 존일파, 김정백을 일세조로 하는 수문장공 정백파로 크게 분파되었고, 각 분파마다 작은 지파가 여러 개씩 있다. 경순왕 아들 9형제가 각각 분적하여 나갔다. 다만 셋째 아들 김명종과 넷째 아들 김은열과 김순웅(金順雄) 장군 후손들만이 경주김씨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월성 석씨의 시조(始祖) 석재흥(昔載興)은 신라조(新羅朝) 4대왕 석탈해(昔脫解)의 23대손이며 고려조(高麗朝)에 시랑(侍郞)을 역임했는데 후손들이 시조로 모시고 본관을 월성(慶州의 옛 지명)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전해진다. 월성은 경주의 옛 이름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제12대손 김유신(金庾信)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대소 98파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김유신의 직계종파(直系宗派)는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그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金克一·金馹孫·金大有)이다.

  김해김씨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하여 많은 문무명신(文武名臣)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에 속하며, 고려시대에만도 정승급 15명을 비롯하여, 명신·공신 10여 명과 장군 8명, 제학(提學) 11명 등 숱한 인물을 배출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여 역대 정승 가운데도 숙종 때의 김우항(金宇杭) 한 사람뿐이다.



 대씨(大氏)는 중국(中國) 동래(東萊 산동성 교동도 봉래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발해국(渤海國)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698년 고구려(高句麗) 무장(武將)이었던 중상(仲象)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을 지배층으로, 말갈족을 피지배층으로 세웠던 발해(渤海)가 요(遼)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발해의 세자(世子)였던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망명한 것이 우리나라 대씨(大氏)의 기원이 된다고 전해진다. 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의 아들이었던 대탁(大鐸)이 발해가 망하자 이끌고 밀양(密陽)에 정착하여 밀양대씨(密陽大氏)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중시조 태금취(太金就)는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으로 대중상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이다. 태금취는 고려 고종 때 금교(金郊)에서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영순군(永順君)에 봉해졌는데 영순(永順)은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 따라서 후손들은 대중상을 도시조로, 태금취를 시조로 하고 영순(永順)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대씨(大氏)가 태씨(太氏)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발해가 멸망한 뒤 934년(태조 17)에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자, 고려 태조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에게 원보수(元甫守)의 벼슬과 함께 태씨(太氏)를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동국통감(東國通監)》에서 대조영을 태조영(太祚榮)이라 한 후로 자손들이 태씨를 칭하였다는 것이다.태씨는 이외에도 협계(陜磎), 남원(南原), 나주(羅州), 밀양(密陽) 등을 관향으로 삼고 있으나 모두 한 뿌리에서 갈라진 것이다.